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여행같은 일상/맛집

을밀대 평양냉면 그리고 냉면의 추억

을밀대에서 평양냉면을 먹고 왔다. 오래 된 외관이 멋스럽다. 이곳을 지나칠 때 마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, 오늘은 마침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4시에 와 줄이 없었다. 계획엔 없었으나 유명한 집이라니 한번 먹어보기로 했다.


나에게 냉면의 맛이란 빠알간 다대기가 들어간 새콤달콤한 맛이다. 거기에 깻가루가 들어가 고소한.. 이 맛은 창동 뚱보냉면의 맛이다. 다대기의 맛이 풍부하고 깻가루가 포인트인 칡냉면을 맛보고 싶다면 뚱보냉면을 추천한다.

할머니댁이 창동에 있다보니 어릴 때부터 이 냉면을 많이 먹었다. 심지어 양재동에 살 때도 창동에서 포장을 해다 먹을 정도였으니 내가 이 맛에 길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. 물론 우선 맛이 있었고.

그런데 요즘 인기라는 평양냉면은 몹시 밍밍한 맛이라고 한다. 밍밍하다며 왜 먹을까? 어른입맛이라던데, 괜히 그 맛이 궁금했다.

생각해보니 평양냉면을 한 번도 안먹어 본 건 아니다. 대학생 때 잠깐 봉피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. 냉면을 서빙할 때마다 고소한 참기름(?) 냄새에 구미가 당겼다. 하지만 어느날 냉면을 한 입 먹어보니 뭔가 밋밋한 맛.. 아 내가 상상했던 그 고소하고 구수한 맛은 어디로 간거지???


오늘은 제대로 평양냉면을 맛보기로 한다. 이제 진짜 어른이라 해도 될 나이가 됬으니 어른입맛에 도전!


참으로도 정갈한 평양냉면이 나왔다. 내가 기대했던 두툼한 고기라던지, 풍성한 고명 따윈 없다. 동그랗게 말아 놓은 면 위로 무우 조금 오이 조금 아주 얇은 고기 조금 배도 조금. 그리고 옆에 무심히 띄워 놓은 계란 반쪽.

그래. 평양냉면이라 함은 자고로 육수 맛 아니겠는가. 옆 테이블에선 어떻게 먹는지 힐끔 곁눈질을 한 뒤, 나도 얼굴만한 냉면그릇을 양손에 쥐고 호로록 마셨다.

마늘. 마늘 맛이 났다.

이번엔 면을 한 젓가락 집어 먹어 봤다. 약간 오돌도돌한 식감이 좋다. 면을 살짝 집어 육수에 담갔다 먹으니 심심하면서도 맛이 괜찮다.

심심한 맛에 자꾸만 국물을 들이마시게 된다. 그릇에 얼굴을 박고 국물을 호로록 마실 때 면발이 쪼르르 따라 들어오는 맛이 너무 좋았다.

또 심심한 맛에 자꾸만 반찬으로 준 새콤한 무우 무침에 손이 간다. 이 녀석은 먹을 수록 새콤달콤한 냉면의 맛을 생각나게 할 뿐, 심심한 평양냉면의 맛에 익숙해지는데는 도움이 되질 않았다.

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평가는 이러했다.
"이래서 사람들이 빨리 먹나보다. 별 맛이 없어서."

날도 쌀쌀한데 차가운 냉면을 먹으니 배가 아플 것 같아 따뜻한 육수를 마셨다. 이 녀석도 몹시 맹맹하다. 정말 절대 조미료를 넣지 않은 맛!

반 이상 먹으니 배가 부른다. 이렇다 할 고명은 없지만 면의 양이 꾀 많다. 내가 밥을 조금 먹는 편은 아닌데, 양이 진짜 많다고 느꼈다. 자극적인 맛이 아니다 보니 식욕이 덜 땡겨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.

기다란 쇠 젓가락으로 젓가락질을 하다보니 손이 아프다. 안그래도 젓가락질을 못하는데.. 평양냉면먹기 힘들구나.

먹으면 먹을 수록 점점 더 심심해지지만 깨끗이 다 먹었다. 마무리로 온육수도 호로록.

먹고 나니 입 안에 남는 맛이 없이 깔끔하다. 집에서 냉면 육수를 만들어 먹으면 이런 맛일까?

특별히 차린 건 없지만 면을 듬뚝 담아 준 것이 배불리 먹고 가라는 정겨움이 느껴진달까?

이 맛에 평양냉면을 먹나보다. 남는 것 없이 깔끔한 뒷 맛이 되려 자꾸만 평양냉면을 떠올리게 한다.